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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책 리뷰(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책으로다이브 2023. 1. 6. 15:02

[진주의 결말]

김연수는 소설을 진행시키는 화자의 관점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소설의 속성에 맞는 것은 3인칭 시점임이 확실하지만, 이제 진지하게 쓰는 소설에서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의 소설은 1인칭 화자*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화자는 소설의 전반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만 현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화자이다. 이 부분이 무척 중요한데 어떤 사건에 대해 개인적 판단을 한다는 것은 그 서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소설이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동적 독자를 만들었다면, 1인칭 서술은 화자를 마냥 신임하지 못하는 능동적인 독자가 생겨나는 셈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항상 그 말을 기억한다.

 

'진주의 결말'은 그런 작가의 생각이 담긴 소설이다. 작가가 가장 의문을 가지는 명제는 '과연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진주의 진심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TV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심리학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화자에게 온 한 통의 편지, 수사를 받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억울하다고 하는 용의자의 편지가 바로 이 소설 자체이다. 그녀는 심리학자인 선생님마저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이해지 못한다고 말한다. 김연수는 바로 그 지점,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그 엇갈림에 대해 항상 고민해 왔다. 애석하게도 그 결론은 항상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 하다'였다. 

 

용의자 진주는 치매걸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살해혐의를 받고 있었다.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TV속 프로파일러가 자신의 사건을 분석했다는 사실에 자신을 잘 이해해줄까 기대를 하지만 크게 실망한다. 전제가 틀린 분석은 관점이 다른 소설가처럼 진실에 가까울 수 없었다. 진주는 그 실망스러운 맘을 담아 편지를 보냈고, 화자인 나는 그녀의 편지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진실이라는 것은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듯 보여지는 현상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라거나 선의나 악의로 찾아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명백히 보이는 증거들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보내는 편지는 다만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가 있을 뿐 진실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는 진주가 아버지를 죽인 것은 거기까지 내몰린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지만, 그녀는 편지를 통해 그의 모든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했다. 결국 상황과 증거로만 말하기 때문에 틀릴 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 심리학자의 주장은 또 다른 사실의 등장으로 무참히 무너진다. 완벽한 논리로 지어졌다고 믿는 생각들은 그 반론이 하나만 있어도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결국 그녀에 대한 의심들은 그들의 기대만큼 논리적이도 완벽하지도 않았음이 밝혀진다. 그의 말들 듣고 모든 방송의 초점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딸의 사연으로 만들었던 PD도 그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진주는 심리학자에게 묻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절대 확신한다고 할 만한 모든 사실들이 준비된 상황에서조차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자신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서만 현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한정되고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 시작점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남도 내 맘 같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적어도 '소통'이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그 기본값이 '0'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용은 존속 살해의 용의자와 이를 바라보는 전문가와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나와 타자의 그 간극을 이야기 하고 있는 단편이다.

 

[1인칭 화자*와 관련해서 보르헤스의 픽션들 단편 중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친구 카사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인칭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모순에 개입하기 때문에, 오직 몇 명의 독자들, 즉 극소수의 독자들만이 잔혹하거나 진부한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다음 리뷰는 그 단편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