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일은 아주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일, 하던 대로 지속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노력과 끈기 그런 걸로는 설명하기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 건 김연수의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소설을 계속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 소설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당연함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서 한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는 건 아니다. 좋아한다는 건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기대가 있다는 건 실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망에도 무릅쓰고 계속 좋아하는 일, 계속 읽는 일, 그건 용기를 넘어 확신 같은 거라고 할까.
누군가 내가 읽은 김연수 소설의 분위기가 내내 같은 게 아니겠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비슷하고 같다는 이유라면 나는 이미 그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함께 독자도 나이를 먹고 살아가다 보니 소설을 통해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점점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게 아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이 순간의 아름다움과 평범하고 흔한 일상의 다정함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이 글은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대한 리뷰라고 할 수 없다. 처음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읽은 첫 번째 소설 이후 그의 소설과 산문을 읽는 동안 좋은 리뷰를 쓰고 싶었다. 잘 쓴 리뷰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대해서는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가장 최근에 만난 김연수의 단편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을 읽으면서 두 번째 바람을 맞이하는 게 인생이라고, 아니 얼마나 많은 N 번째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상실과 슬픔, 절망과 죽음 속에서 우리는 다음을 향해 나가고 있다고.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수록된 20편의 짧은 소설은 저마다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좋음에 대해 애써 설명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과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냥하고 친절한 이야기라고만 하겠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 결국엔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노력,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에 대해, 타인을 향한 이유 없는 다정함이 우리가 몰랐던 가능성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맞이하게 될 다음에 대한 이야기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코로나 다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김연수 작가가 어머니와 작별하지 않았더라면 딸인 열무와 작별하는 미래는 지금 쓰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뉴욕제과의 막내아들이 기억하는 어머니, 일본어를 쓰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더 나중에 쓰였을지도 모른다.
낭독회를 위해 쓰인 소설이라는 점도 특별하다. 공포로 가득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피신한 가족에게 이미 전쟁을 경험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흔한 지혜로 울림을 전하는 「두 번째 밤」으로 시작해 어머니의 임종과 엄마와의 추억과 일상을 천천히 들려주는 자전적 에세이 같은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마지막으로 배치한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원하지만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그런 과거가 바랐게 미래가 정녕 이런 모습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김연수의 말대로 우리는 미래의 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슬픔과 미련에 매달리는 대신 미래의 긍정을 향해서 말이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과 함께.
우리는 저절로 아름답다. 뭔가 쓰려고 펜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추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채, 다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바라볼 때, 지금 이 순간은 완벽하다. 이게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세계라는 게 믿어지는가? 이것은 완벽한, 단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 속에서는 우리 역시 저절로 아름다워진다. 생각의 쓸모는 점점 줄어들고, 심장의 박동은 낱낱이 느껴지고, 오직 모를 뿐인데도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55~256쪽)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맣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 「너무나 많은 여름이」, 281쪽)
너무나 많은 비가 내리는 여름에 만난 김연수의 글이 지친 나를 달랜다. 습하고 불쾌한 감정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위로한다. 이 여름을 견디고 나면 조금만 버티면 젖은 바람이 아닌 마른 바람이 도착할 거라고. 그 당연한 걸 잊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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